대법원 2025. 7. 24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 [배당이의의소] [공2025하,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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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2025. 7. 24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 [배당이의의소] [공2025하, 1526]
판 시 사 항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되는지
여부(소극)
판 결 요 지
[다수의견]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는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법리(이하 '추정 법리'라 한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당하지 않다.
①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자의 채무승인으로부터 시효완성에 관한 채무자의 인식 및 그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채무자의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법리이다. 이러한 인식의 추정 및 의사표시의
추정은 경험칙에 근거하여 인정되는 사실상 추정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경험칙으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오히려 경험칙에 어긋난다.
시효완성에 대한 인식의 추정은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다. 시효완성 여부는 소멸시효 기간,
소멸시효 기산점, 소멸시효의 중단 또는 정지 사유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요소에
대한 판단은 때로 불명확하고 복잡하므로 단지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는 사정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추정도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다. 시효이익 포기는 시효완성을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의사표시이다. 그런데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인하여 그 기산일로 소급하여
채무에서 해방되는 법적 이익을 누리게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 이익을 포기하고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 하는 채무자의 인식과 의사에 관한 경험칙은 나라마다 크게 달라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추정 법리는 비교법적으로 볼 때 이례적인 법리로 평가된다.
② 시효이익 포기는 단순히 채무에 관한 인식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자신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시효이익의 포기라는 법적 효과를 의욕하는 효과의사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채무승인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러한 효과의사는 채무자에게 불리한 법적 결과를 채무자의 자기결정에 따라
정당화하는 시효이익 포기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는 채무승인 행위에는 요구되지 않는 요소이므로,
시효완성 후 소멸시효 중단사유에 해당하는 채무승인 행위가 있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곧바로
소멸시효 이익의 포기라는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추정 법리는 이러한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근본적인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채무승인
행위가 있으면 이로부터 곧바로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는
추정이라는 간편한 법적 수단에 기대어 세밀하고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할 효과의사에 대한 탐구
과정을 일단 생략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이러한 생략은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해석
과정을 부실하게 만들고, 그 결과 시효이익의 포기 여부에 관한 채무자의 의사결정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도 수반한다.
③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행위만을 근거로 하여 채무자에게 중 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손쉽게 추정한다. 이는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대해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는 대법원 판례의 일반적인 원칙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④ 소멸시효 제도의 취지나 채무자 보호에 관한 민법 제184조 제1항, 제2항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채무자의 법적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사정만
있으면 그 사정으로부터 시효완성 사실에 대한 인식과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추정하고,
채무자에게 이러한 추정을 번복할 부담을 부과한다. 이는 채무자를 본래 법이 예정하지 않았던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리가 추정의 번복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재판 실무와 결합할
경우 채무자의 구조적 열위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또한 추정 법리는 대부업체나 추심업체 등이
시효완성 후 채무자에게 일부 변제 등 채무승인 행위를 압박하거나 유도함으로써 시효이익을
포기하게 하는 데 악용되는 등 금융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할 우려도 있다. 이러한 면에서 추정 법리는
정책적으로도 부당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대법관 노태악, 대법관 오석준, 대법관 엄상필, 대법관 이숙연, 대법관 마용주의 별개의견] 추정
법리는 대법원이 오랜 기간 타당성을 인정하고 적용하여 온 것으로서 여전히 법리적으로나
실무적으로 타당하므로 유지되어야 한다.
① 오랜 기간 일정한 방향으로 축적된 대법원 판례의 견해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견해가 애당초
잘못된 것임이 명백하거나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의관념에 크게 어긋나게 되는 등 이를 바꾸는
것이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가치를 가짐으로써 그로 인한 법적 안정성의 희생이
정당화될 정도의 사정이 있어야 하고, 단순히 새로운 법적 견해가 조금 더 낫다거나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축적된 판례의 견해를 바꾸는 것은 온당하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② 다수의견의 요지는 추정 법리를 폐기하고 의사해석을 통하여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대법원은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구체적 사안에서 채무승인 또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사해석을 통하여 실질적이고 타당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고, 다수의 사례
축적을 통하여 법리 적용에 관한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이 충분히 확보되었다.
③ 다수의견이 내세우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유무에 관한 구체적 판단 기준과 종전 판례의
의사해석 판단 기준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④ 대법원은 일관되게 추정 법리를 설시하면서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해 왔다. 이로써 그 법리가
민사재판에서 법원의 판단 기준, 적어도 의사해석의 출발점으로 작동해 왔으며, 당사자도 그 법리에
맞추어 주장ㆍ증명을 하고 그에 따른 판단 결과를 받아들여 왔다.
⑤ 추정 법리의 근거인 '일반적으로 채권은 시효기간이 지나면 소멸한다는 사실을 안다.'라는
경험칙이 처음부터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거나 그 효력을 더는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일반의
상식에 반하는 것이 되었다고 볼 만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
⑥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차이를 근거로 추정 법리가 부당하다는 지적 역시 타당하지 않다.
추정 법리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효과의사에 대한 탐구가 생략되고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해석이
부실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추정 법리를 오해하여 잘못 적용한 것이지 추정 법리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⑦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그와 같은 지위(층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와 동일한 기준으로 엄격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⑧ 시효이익의 포기 여부가 쟁점인 상황에서 추정 법리가 없다면 채권자는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할 의사로 채무승인 행위를 하였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심의 의사를
증명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추정 법리는 이러한 채권자의 증명곤란을 구제하기 위하여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하되, 채무자가 반증을 통하여 추정을 번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즉 추정 법리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법리인 것이다.
⑨ 대법원은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채무승인이 존재하는지 더 나아가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사해석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건에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왔다.
따라서 다수의견이 말하는 것처럼 추정 법리가 채무자를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한다거나 정책적으로
부당한 결과를 야기한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법리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시효이익 포기 의사표시가
있었는지에 관한 증명 정도의 문제이고, 의사해석의 문제이다.
참 조 조 문
민법 제184조
재 판 경 과
대전법원원합 의20체25. 7. 24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
인천지방법원 2023. 4. 28 선고 2021나64385 판결
인천지방법원 2021. 6. 2 선고 2020가단202806 판결
참 조 판 례
대법원 1967. 2. 7. 선고 66다2173 판결(집15-1, 민89)(변경), 대법원 1992. 5. 22. 선고
92다4796 판결(공1992, 1980)(변경), 대법원 1999. 1. 26. 선고 98다46808 판결(변경), 대법원
2007. 11. 29. 선고 2005다64552 판결(공2007하, 2001), 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다21556 판결(공2013상, 547), 대법원 2013. 5. 23. 선고 2013다12464 판결(공2013하,
1110)(변경), 대법원 2013. 6. 13. 선고 2011다94509 판결, 대법원 2021. 7. 21. 선고
2021다219116 판결(공2021하, 1520), 대법원 2022. 5. 12. 선고 2021다244, 251 판결(변경),
대법원 2025. 6.
26. 선고 2025다209893, 209894 판결(공2025하, 1329)
전 문
【원고, 상고인】 원고
(소송대리인 변호사 안관주)
【피고, 피상고인】 피고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광화문 담당변호사 이재용 외 7인)
【원심판결】 인천지법 2023. 4. 28. 선고 2021나64385 판결
주 문
원심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이 부분 사건을 인천지방법원에 환송한다.
이 유
상고이유를 판단한다.
1. 사안의 개요
원심판결 이유와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 원고와 피고는 상인들이다.
나. 원고는 2006. 12. 28. 피고로부터 3,000만 원을 이자 연 20%, 변제기 2009. 12. 31.로 정하여
차용하였고(이하 '제1 차용금'이라 한다), 피고에 대하여 부담하는 일체의 채무를 담보하기 위하여
원고가 소유하는 이 사건 부동산에 관하여 피고 앞으로 채권최고액 1억 5,000만 원의
근저당권설정등기를 마쳐 주었다(이하 '제1 근저당권'이라 한다).
다. 원고는 피고로부터, 2009. 6. 20. 9,000만 원을 이자는 정하지 않고 변제기는 2009. 12. 30.로
정하여 차용하였고(이하 '제2 차용금'이라 한다), 2011. 1. 25. 2,000만 원을 이자와 변제기를
정하지 않고 차용하였다(이하 '제3 차용금'이라 한다).
라. 원고는 2015. 11. 2. 피고로부터 1억 원을 변제기 2016. 11. 1.로 정하여 차용하였고(이하 '제4
차용금'이라 한다), 피고에 대하여 부담하는 일체의 채무를 담보하기 위하여 원고가 소유하는 이 사건
부동산에 관하여 피고 앞으로 채권최고액 2억 원의 근저당권설정등기를 마쳐 주었다(이하 '제2
근저당권'이라 한다). 당시 원고가 피고에게 작성해 준 이 사건 차용증에는 '일금: 1억 원정. 전 미수금
1억 4,000만 원 합계 2억 4,000만 원', '이자는 연 150만 원(월 150만 원의 오기로 보인다)으로
하여 매월 30일에 지급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마. 원고는 피고에게 2016. 2. 6. 150만 원, 2016. 3. 19. 150만 원, 2016. 9. 30. 500만 원,
2017. 7. 6. 1,000만 원 등 합계 1,800만 원을 송금하였다.
바. 피고의 경매신청에 따라 2019. 4. 8. 이 사건 부동산에 관하여 임의경매절차가 개시되었고,
2020. 1. 8. 배당기일에서 실제 배당할 금액 546,597,075원 중 461,436,162원을 제1, 2
근저당권자인 피고에게, 잉여금 43,984,345원을 채무자 겸 소유자인 원고에게 각 배당하는
내용으로 배당표가 작성되었다.
2. 이 사건 차용증에 따른 경개약정의 성립 여부(제1 상고이유)
원심은 이 사건 차용증의 내용, 차용금 담보를 위하여 설정한 근저당권의 내용 등을 종합하면 이 사건
차용증 작성으로 기존 차용 원금 및 그에 대한 이자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채무를 성립시키는
경개약정이 체결되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원심판결의 이유를 기록에 비추어
살펴보면 이러한 판단은 수긍할 수 있고, 거기에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반하여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잘못이 없다.
3.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대한 시효이익 포기 여부(제2 상고이유)
가. 원심의 판단
원심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원고가 제1, 2 차용금의 각 변제기까지 발생한 이자채무(이하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라 한다)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의 이익을 포기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원금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채무자가 채무를 일부
변제한 때에는, 그 액수에 관하여 다툼이 없는 한 그 원금채무에 관하여 묵시적으로 승인하는 한편 그
이자채무에 관하여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고는 제1, 2 차용금
원금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으나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는 완성된 상태에서
2016. 2. 6.부터 2017. 7. 6.까지 제1 내지 4 차용금을 일부 변제함으로써,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하여 소멸시효 완성의 이익을 포기하였다.
나. 시효이익 포기 추정 법리의 타당성
원심은'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는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법리(대법원 1967. 2. 7. 선고 66다2173 판결 등, 이하 '추정법리'라 한다)에
근거하여 위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추정 법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당하지 않다.
1)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자의 채무승인으로부터 시효완성에 관한 채무자의 인식 및 그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채무자의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법리이다. 이러한 인식의 추정 및 의사표시의
추정은 경험칙에 근거하여 인정되는 사실상 추정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경험칙으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오히려 경험칙에 어긋난다. 시효완성에 대한 인식의 추정은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다. 시효완성 여부는 소멸시효 기간, 소멸시효 기산점, 소멸시효의 중단 또는 정지 사유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요소에 대한 판단은 때로 불명확하고 복잡하므로 단지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는 사정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는지는 개별 사안의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 경험칙에 따라 일률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추정도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다. 시효이익 포기는 시효완성을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의사표시이다. 그런데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인하여 그 기산일로 소급하여 채무에서 해방되는 법적
이익을 누리게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 이익을 포기하고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보통의 채무자라면 이처럼 자신의 법적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굳이 불리한 법적
지위를 자청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험칙에 비추어 보면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 하는 채무자의 인식과 의사에 관한 경험칙은 나라마다 크게 달라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추정 법리는 비교법적으로 볼 때 이례적인 법리로 평가된다.예를
들어 독일이나 미국에는 이러한 추정 법리가 존재하지 않고, 시효이익 포기 여부는 개별 사안별로
살펴보아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프랑스에도 추정 법리는 존재하지
않고, 시효의 묵시적 포기는 시효를 주장하지 않는 의사가 명확히 드러나는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인정된다는 민법 규정(제2251조 제2항)이 있다. 일본에도 현재 추정 법리는 판례상 채택되어 있지
않다.
2) 소멸시효 중단사유인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소멸시효
중단사유인 채무승인은 소멸시효가 완성되기 전에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으로 채권을 상실할 자에
대하여 상대방의 권리 또는 자신의 채무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을 표시함으로써 성립하는 관념의
통지이다. 시효이익 포기는 소멸시효가 완성된 후에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을 알면서 이로 인한 법적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성립하는 의사표시이다.
이처럼시효이익 포기는 단순히 채무에 관한 인식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자신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시효이익의 포기라는 법적 효과를 의욕하는 효과의사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채무승인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러한 효과의사는 채무자에게 불리한 법적 결과를 채무자의 자기결정에 따라
정당화하는 시효이익 포기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는 채무승인행위에는 요구되지 않는 요소이므로,
시효완성 후 소멸시효 중단사유에 해당하는 채무승인행위가 있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곧바로
소멸시효 이익의 포기라는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다21556 판결 등 참조).
추정 법리는 이러한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근본적인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채 채무승인
행위가 있으면 이로부터 곧바로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는
추정이라는 간편한 법적 수단에 기대어 세밀하고 엄격하게 이루어져야할 효과의사에 대한 탐구
과정을 일단 생략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이러한 생략은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해석
과정을 부실하게 만들고, 그 결과 시효이익의 포기여부에 관한 채무자의 의사결정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도 수반한다.
3) 대법원은 권리 포기 등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의사표시는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법리를
펼쳐 왔다. 채권의 포기 또는 채무의 면제는 묵시적인 의사표시에 의하여 할 수도 있지만 그
의사표시의 해석은 엄격해야 한다(대법원 2013. 6. 13. 선고 2011다94509 판결).
손해배상청구권의 포기는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포기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는지, 포기의 동기나 이유가 있는지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07. 11. 29. 선고 2005다64552 판결). 동시이행항변권의 포기는
명시적 의사표시뿐만 아니라 묵시적 의사표시로 이루어지는 것도 가능하지만, 묵시적 의사표시의
해석을 통한 동시이행항변권 포기의 인정은 엄격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대법원 2025. 6.
26. 선고 2025다209893, 209894 판결). 한쪽 당사자가 주장하는 약정의 내용이 상대방에게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불이익을 부과하는 경우에는 그 약정의 의미를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한다(대법원 2021. 7. 21. 선고 2021다219116 판결).
이상의 법리는 권리나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의 의사표시가 있었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그
이례성과 결과의 중대성에 비추어 당사자가 실제로 자신에게 불리한 법적 결과를 의욕하고 그 의사를
외부로 표시한 것인지를 여러 사정에 비추어 엄격하고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특히 일정한 행위로부터 그 행위자의 의사를 추단하는 묵시적 의사표시의 경우에는 이러한 해석
기준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행위만을 근거로
하여 채무자에게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손쉽게 추정한다. 이는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대해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는 대법원 판례의 일반적인
원칙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4)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일정 기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상태가 발생한
경우 일정한 요건 아래 권리를 소멸시킴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도모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를 통해
채무자는 소멸시효가 완성되면 채무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법적 이익을 누리게 된다. 민법은 이러한
법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채무자가 이러한 소멸시효의 이익을 미리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제184조 제1항), 법률행위에 의하여 소멸시효를 단축 또는 경감하는 것은 허용하면서도 배제,
연장 또는 가중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제184조 제2항). 이는 채권자가 채무자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여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이익을 정당하게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한편 의사표시 또는 법률행위의 이름 아래 소멸시효 제도의 목적이 부당하게 좌절되지 않도록 하는
조항이다.
한편 민법 제184조 제1항의 반대해석상 시효완성 이후 채무자가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허용된다. 다만소멸시효 제도의 취지나 채무자 보호에 관한 위 규정들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채무자의 법적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사정만
있으면 그 사정으로부터 시효완성 사실에 대한 인식과 시효이익포기의 의사표시를 추정하고,
채무자에게 이러한 추정을 번복할 부담을 부과한다. 이는 채무자를 본래 법이 예정하지 않았던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리가 추정의 번복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재판 실무와 결합할
경우 채무자의 구조적 열위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또한 추정 법리는 대부업체나 추심업체 등이
시효완성 후 채무자에게 일부 변제 등 채무승인 행위를 압박하거나 유도함으로써 시효이익을
포기하게 하는 데 악용되는 등 금융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할 우려도 있다. 이러한 면에서 추정 법리는
정책적으로도 부당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다. 판례의 변경
이와 달리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본 대법원 1967. 2. 7. 선고 66다2173 판결, 대법원 1992. 5. 22. 선고
92다4796 판결, 대법원 1999. 1. 26. 선고 98다46808 판결, 대법원 2013. 5. 23. 선고
2013다12464 판결, 대법원 2022. 5. 12. 선고 2021다244, 251 판결 등을 비롯하여 그와 같은
취지의 판결들은 이 판결의 견해에 배치되는 범위에서 이를 모두 변경하기로 한다.
라. 이 사건에 관한 판단
이러한 법리에 비추어 원심판결 이유를 살펴본다. 원고가 2016. 2. 6.부터 2017. 7. 6.까지 합계
1,800만 원(이는 제4 차용금의 차용 시부터 변제기까지 12개월분의 약정이자와 일치하는
액수이다)을 피고에게 일부 변제한 사실은 인정되나, 그것만으로 당시 원고가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그로 인한 법적인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원심으로서는 원고가 피고에 대한 차용금채무 중 일부를 변제할 당시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심리하였어야 한다. 여기서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는 일부 변제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및 자발성, 일부 변제액과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무액 사이의 차이, 일부 변제 당시 시효기간을 도과한 정도, 일부 변제 당시 및 전후의 언동,
당사자들의 관계와 거래지식 및 경험 등 개별 사안에 존재하는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원심은 위와 같은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원고가 제1, 2 차용금 이자 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피고에게 차용금 중 일부를 변제하였다는 사실로부터 곧바로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하여 원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하였다. 이러한 원심판단에는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4. 파기의 범위
원심판결의 원고 패소 부분 중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하여 원고가 시효이익을 포기하였다고
판단한 부분에는 앞에서 본 파기사유가 있다. 그런데 환송 후 원심이 파기취지에 따라
심리ㆍ판단하였을 때 원고의 피고에 대한 차용원리금 채무 액수와 변제충당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
이러한 경우 원고와 피고가 배당받을 정당한 금액을 새로 산정할 필요가 있으므로, 결국 원심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전부 파기하여야 한다.
5. 결론
그러므로 원심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이 부분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이 판결에는 대법관 노태악, 대법관 오석준, 대법관 엄상필,
대법관 이숙연, 대법관 마용주의 별개의견이 있는 외에는 관여법관의 의견이 일치하였고, 다수의견에
대한 대법관 권영준의 보충의견, 별개의견에 대한 대법관 노태악의 보충의견이 있다.
6. 대법관 노태악, 대법관 오석준, 대법관 엄상필, 대법관 이숙연, 대법관 마용주의 별개 의견
가. 별개의견의 요지
이 사건에서 '원심판결 중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한 판단 부분에는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는 결론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하여 이른바 '추정 법리'를 폐기하는 것으로 판례를 변경해야
한다는 다수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다.추정 법리는 대법원이 오랜기간 타당성을 인정하고 적용하여 온
것으로서 여전히 법리적으로나 실무적으로 타당하므로 유지되어야 한다.
나. 먼저 이 사건에 관한 구체적인 판단 이유를 밝힌다.
1) 별개의견은 이 사건의 결론뿐만 아니라 그 이유에서도 사실상 다수의견과 다르지 않다. 즉,
다수의견과 마찬가지로 “원고가 2016. 2. 6.부터 2017. 7. 6.까지 합계 1,800만 원을 피고에게 일부
변제한 사실은 인정되나, 그것만으로 당시 원고가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그로 인한 법적인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원심으로서는 원고가 피고에 대한 차용금채무 중 일부를 변제할 당시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심리하였어야 한다. 여기서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는 개별 사안에 존재하는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다만 다수의견은 그와 같은 원심의 잘못을 추정 법리 탓으로 돌리지만, 별개의견에서는 추정
법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심이 그 법리를 잘못 해석적용하였다고 본다.
2) 추정 법리를 유지하더라도 원심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부분 역시
다수의견이 원고의 변제금액 1,800만 원에 관하여 “(이는 제4 차용금의 차용 시부터 변제기까지
12개월분의 약정이자와 일치하는 액수이다)”라고 기재함으로써 드러내고자 했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일 뿐 실질적으로 다수의견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가) 채무를 승인하였는지, 나아가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의 판단은 표시된 행위
내지 의사표시의 내용과 동기 및 경위, 당사자가 의사표시 등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과
진정한 의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논리와 경험의 법칙, 그리고
사회일반의 상식에 따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대법원 2008. 7. 24. 선고
2008다25299 판결, 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다21556 판결 등 참조). 동일 당사자 간에
계속적인 거래로 같은 종류를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개의 채권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경우에 채무자가
특정채무를 지정하지 않고 그 일부를 변제한 때에도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잔존채무를 승인한
것으로 보아 시효중단이나 포기의 효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나, 각 채무가 별개로 성립되어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일률적으로 그렇게만 해석할 수 없고, 특정 목적을 위하여 채무를
변제한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목적과 무관한 별개의 채무에 대해서까지 채무를
승인하거나 소멸시효의 이익을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대법원 1993. 10. 26. 선고 93다14936
판결, 대법원 2014. 1. 23. 선고 2013다64793 판결 등 참조).
나) 이 사건 제1 내지 4 차용금채무는 2006. 12. 28.부터 2015. 11. 2.까지 약 10년 동안 4차례에
걸쳐 별개로 성립되어 독립성을 갖고 있다. 원고는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피고로부터 제4 차용금 1억 원을 추가로 빌렸는데, 당시 원고가 피고에게 작성해 준 이 사건
차용증에는 '일금 1억 원. 전 미수금 1억 4,000만 원(제1 내지 3 차용금의 원금이다) 합계 2억
4,000만 원', '이자 월 150만 원을 매월 30일에 지급'이라고 기재되어 있을 뿐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한 언급이 없다. 특히 원고가 2016. 2. 6.부터 2017. 7. 6.까지 피고에게 일부 변제한
합계 1,800만 원은 이 사건 차용증에서 정한 제4 차용금의 12개월분 약정이자와 일치하는 액수인
반면, 그 당시 이미 시효가 완성된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비해서는 현저히 적은 금액이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면, 원고는 제4 차용금의 이자채무를 지정하여 변제한 것이지 그와 별개의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대해서까지 채무를 승인하거나 소멸시효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여지가 있다.
다) 그런데도 원심은 채무승인 또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해석에 관한 이러한 사항을 충분히
심리하지 않은 채 추정 법리만을 근거로 원고가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판단하여 원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하였다. 이러한 원심의 판단에는 채무의 승인 또는
소멸시효 이익의 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3) 요약하자면, 원심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는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법리를 적용함에 있어 그 추정의 전제가 되는 채무승인 사실의
인정 및 시효이익 포기의 효과의사 유무에 관한 의사해석에 관하여 종전판례의 법리에 어긋나는
판단을 한 것이지 원심이 적용한 추정 법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에 이른 것이
아니다.
다. 이 사건의 결론을 끌어내는 데에 '추정 법리' 판례의 변경은 필요하지 않다.
1)오랜 기간 일정한 방향으로 축적된 대법원 판례의 견해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견해가 애당초 잘못된
것임이 명백하거나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의관념에 크게 어긋나게 되는 등 이를 바꾸는 것이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가치를 가짐으로써 그로 인한 법적 안정성의 희생이
정당화될 정도의 사정이 있어야 하고, 단순히 새로운 법적 견해가 조금 더 낫다거나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축적된 판례의 견해를 바꾸는 것은 온당하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특히
사법의 본질은 구체적 사건의 권리구제를 목적으로 하므로, 판결의 결론에 영향이 없다면 단지 판결의
이유 구성을 달리하기 위한 판례 변경은 그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원칙적으로 판례의 변경은,
판례를 유지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결론이 달라지는 사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구체적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판례 변경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다수의견의 요지는 추정 법리를 폐기하고 의사해석을 통하여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대법원은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구체적 사안에서 채무승인 또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사해석을 통하여 실질적이고 타당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고, 다수의 사례
축적을 통하여 법리 적용에 관한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이 충분히 확보되었다.앞서 인용한 대법원
2008. 7. 24. 선고 2008다25299 판결, 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다21556 판결 등이 바로
그것이며, 후자의 판결 중 해당 부분은 다수의견이 근거로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3)다수의견이 내세우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유무에 관한 구체적 판단 기준과 종전 판례의
의사해석 판단 기준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일부 변제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및 자발성, 일부 변제액과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무액 사이의 차이, 일부 변제 당시 시효기간을
도과한 정도, 일부 변제 당시 및 전후의 언동, 당사자들의 관계와 거래지식 및 경험 등 개별 사안에
존재하는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다수의견)라는
것과 “표시된 행위 내지 의사표시의 내용과 동기 및 경위, 당사자가 의사표시 등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과 진정한 의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논리와 경험의
법칙, 그리고 사회일반의 상식에 따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종전 판례)라는 것
사이에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4) 결국 판례 변경 여부가 판결의 결론에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 이 사건에서 판례를 변경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이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를 변경하는 것이 유지하는 것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가치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고, 다수의견의 논거를 살펴보아도 오랜 기간 정립하여
온 추정 법리를 현 시점에서 폐기해야 할 이유와 필요성을 찾기 어렵다.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라. '추정 법리'의 타당성 및 유지 필요성
1) 법리적 측면
가) 대법원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법리를 일관되게 판시해 왔고, 이는 확립된 법리로 정착되었다. 즉 일찍이 대법원
1967. 2. 7. 선고 66다2173 판결이 '채권이 법정기간의 경과로 인하여 소멸시효로 소멸된다는 것은
보통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으므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때에는 일응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최초로 판시한 이래, 최근 대법원
2022. 5. 12. 선고 2021다244, 251 판결에 이르기까지대법원은 일관되게 추정 법리를 설시하면서
구체적 사건에 적용해 왔다. 이로써 그 법리가 민사재판에서 법원의 판단 기준, 적어도 의사해석의
출발점으로 작동해 왔으며, 당사자도 그 법리에 맞추어 주장증명을 하고 그에 따른 판단 결과를
받아들여 왔다.
나)추정 법리의 근거인 '일반적으로 채권은 시효기간이 지나면 소멸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경험칙이
처음부터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거나 그 효력을 더는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일반의 상식에 반하는
것이 되었다고 볼 만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소멸시효는 의용민법 당시부터 존재한 것으로서 1960.
1. 1. 제정 민법 시행 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는 확립된 제도이고, 시효에 의한 권리의
소멸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므로, '채권은 시효기간이 지나면
소멸한다.'는 인식은 오랜 기간 일반인들의 경험적 사실로부터 도출된 공통인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채권은 시효기간이 지나면 소멸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경험칙을 부정하기
어렵다면, 이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채무의 소멸시효 완성 국면에서도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 한
채무자는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사실상 추정할 수 있고, 나아가 '시효완성을 알았는데도
채무승인 행위를 한 사실'로부터 '시효완성으로 인한 법적 이익을 포기할 의사가 있었다.'는 것까지
사실상 추정하는 판단 과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한편 다수의견이 상정하는 '보통의 채무자', 즉 자신의 법적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굳이 불리한 법적
지위를 자청할 가능성이 크지 않은 채무자는 '전적으로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근래 경제학 분야에서의 여러 실험은 실제 인간의 행동이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비합리성과 심리적 편향에 따라 이루어지며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타인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인하여 채무에서 해방되는 이익을 포기하고 계속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분명히 불합리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이례적이라거나 경험칙에 어긋난다고 단정해서 말하는
것에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미 시효기간이 지나 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고 채무자가
그러한 사정을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채무자로서는 법적인 의무 내지 책임과 관계없이 자신의
빚은 언제라도 갚겠다는 의사를 충분히 표시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채무자의 행위나 태도가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을 정도로 드물거나 낯선 것도 아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빚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시효기간이 지나면 채무가 없어지므로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못지 않게, 어쩌면 그보다 더 깊고 넓게 퍼져있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고 상식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효가 완성된 채무일지라도 이를 승인하고 변제하는 것이
경제적 측면에서 채무자에게 더욱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상황도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인간관계가 단지 금전거래의 정산만으로 완전히 종결 내지 단절되지 않는
사회에서는더욱 그러하다.
다수의견은 비교법적으로 볼 때 추정 법리가 이례적임을 지적하나, 소멸시효와 채무부담의사에 관한
경험칙은 나라마다 소멸시효에 관한 법제도와 사회적ㆍ경제적 여건 및 국민들의 인식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종전에 추정 법리를 채택하였다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 채무를 승인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폐기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이상 시효완성 사실을 몰랐더라도 이후 소멸시효를 원용하는 것은 신의칙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오히려 채무자의 소멸시효 항변을 일률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처럼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함으로써 시효를 원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채권자에게 준 경우 신의칙상 채무자의 시효완성 항변이 제한될 수 있다는 사정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 시효이익의 포기로 추정하여 채무자의 시효완성 항변을 배척하는 종전
판례 법리가 결과적으로 부당하지 않다(단지 결론에 이르는 법적 구성을 달리할 뿐이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논거로도 평가할 여지가 있다.
결국 엄밀한 논증 없이 추정 법리가 논리와 우리 사회의 경험칙에 어긋난다고 쉽게 말할수 없다.
다) 다수의견은, 추정 법리가 소멸시효 중단사유로서의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근본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채무승인 행위가 있으면 곧바로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구조를
취하므로 부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추정 법리가 '사실상 추정'에 불과하므로 반증으로 추정이
번복될 수 있다는 점, 대법원이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를 준별하고
있다는 점을 가볍게 여기거나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앞서 본 대법원 2011다21556 판결은, 소멸시효 중단사유로서의 채무승인은 효과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시효이익 포기는 시효완성으로 인한 법적인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시효완성 후 소멸시효 중단사유에 해당하는 채무의 승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곧바로 소멸시효 이익의 포기라는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여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를 명확히 구별하였다. 대법원 2017. 7. 11. 선고 2014다32458 판결 등도 일관되게 위와 같은
법리를 밝혔고, 최근 대법원 2022. 7. 28. 선고 2020다46663 판결은 '채무의 승인에는 해당하지만
소멸시효 이익의 포기에는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판례는
'사실상 추정'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서, 그것들과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
하면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사실상 추정되지만, 채무자의 의사를 해석함에 있어 시효이익 포기의
효과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반증이 제출된다면 추정이 번복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조화롭게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차이를 근거로 추정 법리가 부당하다는 지적 역시 타당하지 않다.
추정 법리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효과의사에 대한 탐구가 생략되고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 해석이
부실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추정 법리를 오해하여 잘못 적용한 것이지 추정 법리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 다수의견은, 추정 법리가 채무자에게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손쉽게 추정한다는 점에서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관하여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는 판례의 일반적인 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시효이익의 포기는 일반적인
권리나 이익의 포기와 구별된다. 소멸시효 완성 여부가 다투어지는 상황에서 권리나 이익을 보유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채권자이고, 채무자는 소멸시효 제도 덕분에 비로소 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항변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을 뿐이며, 시효항변을 하지 않는다면 따로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없더라도
채권자가 시효완성된 채권을 소구 및 집행하는 것에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그와 같은 지위(층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와
동일한 기준으로 엄격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2) 정책적 측면
가)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데도 일정한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의
소멸이라는 법률효과가 발생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법률관계가 점점
불명확해지는 것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로서, 일정 기간 계속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곤란해지는 증거보전으로부터 채무자를 보호하며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사람을 법적
보호에서 제외함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대법원 2020. 7. 9. 선고
2016다244224, 244231 판결 등 참조). 즉, 소멸시효 제도는 일정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권자의 정당한 권리를 소멸시키고 장기간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채무자를 대가 없이
면책시키는 것으로서 채무자 보호 및 법적 안정성의 요청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는데도 채무자 스스로 채무승인 행위를 하였다면 채무자 보호와 법적
안정성의 요청이 크다고 보기 어렵다. 시효기간이 지나도록 오래 유지된 권리의 불행사라는
사실상태의 평온이 다름 아닌 채무자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를 판단할 때는 진정한 권리자인 채권자 보호의 요청도 균형
있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시효이익의 포기 여부가 쟁점인 상황에서 추정 법리가 없다면 채권자는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할 의사로 채무승인 행위를 하였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심의 의사를 증명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추정 법리는 이러한 채권자의
증명곤란을 구제하기 위하여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하되, 채무자가 반증을 통하여 추정을 번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즉 추정 법리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법리인 것이다.
나)대법원은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채무승인이 존재하는지, 더 나아가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사해석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건에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왔다. 따라서 다수의견이 말하는 것처럼 추정 법리가 채무자를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한다거나 정책적으로 부당한 결과를 야기한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법리 자체의 문제이라기보다
시효이익 포기 의사표시가 있었는지에 관한 증명 정도의 문제이고, 의사해석의 문제이다.
(1) 소멸시효 이익의 포기사유로서의 채무승인은 묵시적인 방법으로도 가능하지만, 적어도 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하여 부담하는 채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성립하고, 그러한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 여부의 해석은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논리와 경험의 법칙, 그리고 사회일반의 상식에 따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위
대법원 2008다25299 판결).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의 판단 역시 표시된 행위 내지
의사표시의 내용과 동기 및 경위, 당사자가 의사표시 등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과 진정한
의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논리와 경험의 법칙, 그리고
사회일반의 상식에 따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위 대법원 2011다21556 판결).
이러한 법리에 따라 대법원은, 계속적 물품공급계약 관계에서 개별 거래 시마다 서로 기왕의 미변제
외상대금에 대하여 확인하거나 확인된 대금 일부를 변제하는 등의 행위 없이 새로이 동종 물품을
주문하고 공급받은 사안(대법원 2007. 1. 25. 선고 2006다68940 판결), 채무자가 채권자로부터
소멸시효가 완성된 연대보증채무의 이행청구를 받자 연대보증채무의 성립 및 존재를 부인하면서도
영업 지장을 감안하여 채무액의 일부를 지급하고 사건을 종결하자는 내용의 합의안을 제의하였다가
거절당한 사안(위 대법원 2008다25299 판결), 채무자가 대여금채권의 존부를 다투면서도
대여금채권을 수동채권으로 하는 소송상 상계항변을 하였고 이후 소멸시효 항변을 한 사안(위 대법원
2011다21556 판결), 채무자가 개인회생신청을 하면서 채권자목록에 소멸시효 기간이 완성된
근저당권부 채권을 기재한 사안(대법원 2017. 7. 11. 선고 2014다32458 판결), 채무자가 일부
변제를 조건으로 나머지 채무의 면제를 제안한 사안(대법원 2019. 3. 14. 선고 2018다255266
판결) 등에서 채무승인 또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2) 이 사건에서 문제 되는 '일부 변제' 사안에서도 대법원은 추정 법리를 기본으로 하되 의사해석을
통한 번복 가능성을 남겨둠으로써 구체적 타당성을 도모해왔다. 즉,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는 나머지 채무 전부를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으로서 추정 법리에 따라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면서도, 일부 변제가 나머지 채무에 대한 시효이익 포기에
해당하는지는 의사표시의 해석 문제임을 지적하면서(대법원 1993. 10. 26. 선고 93다14936 판결),
액수에 관하여 다툼이 없으며(대법원 2001. 6. 12. 선고 2001다3580 판결, 대법원 2010. 5. 13.
선고 2010다6345 판결, 대법원 2013. 5. 23. 선고 2013다12464 판결) 특정채무를 지정하지 않고
일부 변제한 때(대법원 2021. 9. 30. 선고 2021다239745 판결)에만 채무 전부를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으로서 추정 법리에 따라 시효이익 포기로 추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대법원은, 채무의 존부 및 범위에 관하여 다투면서도 형사재판절차에서 형사처벌을면하거나
경감할 목적으로 손해배상금을 공탁한 경우 공탁금을 넘는 손해배상채무를 승인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대법원 2010. 9. 30. 선고 2010다36735 판결, 대법원 2015. 4. 9. 선고
2014다85216 판결), 동일 당사자 간에 계속적인 거래로 같은 종류를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개의
채권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경우에 채무자가 특정채무를 지정하지 아니하고 그 일부를 변제한 때에도,
채무자가 가압류 해제 목적으로 피보전채권을 변제하거나 근저당권설정등기 말소 목적으로
피담보채권을 변제한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보전채권 또는 피담보채권이 아닌 별개의
채무까지 승인하거나 그에 관한 소멸시효의 이익을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대법원 1993. 10. 26. 선고 93다14936 판결, 대법원 2014. 1. 23. 선고
2013다64793 판결).
(3) 다수의견은 추정 법리가 대부업체나 추심업체 등이 시효완성 후 채무자에게 일부 변제 등
채무승인 행위를 하도록 압박하거나 유도함으로써 시효이익을 포기하게 하는 데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이 있다면 앞서 본 의사해석 법리에 따라 추정이 번복되고
채무승인 또는 시효이익의 포기 의사표시로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다수의견은 대법원이 지금까지
추정 법리와 의사해석 법리의 조화를 통하여 구체적 사안에서 실질적이고 타당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음을 간과한 것이다. 한편 추정 법리를 폐기하는 대신 신의칙 법리에 따라 채무자의 소멸시효
원용을 배척한 일본에서도 사채업자가 채무자를 압박ㆍ기망하는 방법으로 채무의 일부 변제 등
채무승인을 하게 하여 소멸시효 원용을 막으려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였던 사정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추정 법리를 폐기한다고하여 위와 같은 우려가 곧바로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마.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원심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원심법원에 환송하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수의견과 결론을 같이하지만, 추정 법리를 폐기하는 판례 변경에는 찬성할 수 없어 별도로
의견을 밝힌다.
7. 다수의견에 대한 대법관 권영준의 보충의견
아래에서는 추정 법리의 타당성과 판례 변경의 필요성에 관하여 다수의견을 보충하고 별개의견에
대해 반론한다.
가. 추정 법리의 타당성에 관하여
1) 경험칙에 관하여
별개의견은 '채권이 시효기간 경과로 소멸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경험칙을 근거로,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 한 채무자는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사실상 추정할 수 있고, 나아가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효과의사도 사실상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별개의견이 말하는 경험칙은 시효제도의 일반적 이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이해가 특정 채권의 시효완성 사실에 대한 인식, 나아가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시효이익을 포기한다는 효과의사까지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추정
관계를 뒷받침할 만한 경험칙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추정 법리가
경험칙에 반한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별개의견이 추정 법리의 근거로 제시한 시효제도의 일반적 이해에 관한 경험칙은 일본 대심원이
1917년 판결에서 제시한 경험칙과 같은 내용이다. 이는 일본에서도 추정 법리를 뒷받침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 최고재판소는 1966년 판결에서 시효완성의 인식과 시효이익 포기의
효과의사에 관한 경험칙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추정 법리를 폐기하였다. 독일, 프랑스, 미국 등 다른
주요 국가에서도 이러한 추정 법리는 인정되지 않고, 시효이익 포기의 인정은 개별적이고 엄격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시효제도의 일반적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아 추정 법리까지
이끌어내는 것은 비교법적 관점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태도가 아니다.
특정한 채권의 시효완성 여부는 단순히 '채권은 시효기간이 경과하면 소멸한다.'는 정도의 일반적
이해를 넘어서 다양한 법적 요소에 관한 복합적 판단을 통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법적
요소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예시해 본다. 해당 권리에 적용되는 시효기간은 10년인가, 5년인가,
아니면 3년인가? 시효기간의 기산점은 언제인가? 해당 권리는 기한부 권리인가? 기한이 있다면
확정기한인가 불확정기한인가? 불확정기한이라면 기한이 도래하였는가? 기한의 이익이 상실되지는
않았는가? 권리 행사에 법률상 장애가 있었는가? 시효중단 사유는 발생하였는가? 채무자의 어떤
행위가 채무승인으로 평가될 수 있는가? 시효중단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중단된 시효는 언제부터
다시 진행하는가? 시효정지 사유는 없는가? 시효완성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숱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안마다 달라질 수 있다. 그 답변을 위해 때때로 복잡하고 까다로운 법적 판단이 요구된다.
시효를 둘러싼 법적 분쟁이 빈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형화된 법리 형태로 선언되는 추정은 어느 정도의 획일적인 사실인정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사표시, 특히 묵시적 의사표시 해석은 사안의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추정 법리는 존재하지 않는 경험칙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문제이지만, 개별적으로 탐구되어야 할
의사표시 해석을 채무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과도하게 정형화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별개의견은 인간의 행동이 때때로 경제적 비합리성과 심리적 편향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경제학의 실험 결과를 언급하며,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행동도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행동이 가능한가가 아니다. 채무자의 그러한 행동이 추정 법리를
정당화할 만큼 경험칙으로 뒷받침되는 일반적 행동인가이다. 다수의견은 그렇게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별개의견은 이에 대해 적극적이고 의미 있는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추정 법리는 사법 신뢰의 관점에서도 문제이다. 경험칙은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얻어지는 사물의
성상이나 인과관계에 관한 사실 판단의 법칙이다. 경험칙은 일반적 상식에 근거한 경우와 전문적
영역에 특화된 경우로 나뉜다. 이 사건에서 문제 되는 경험칙은 전자, 즉 일반적 상식에 근거한
것이다. 법원이 이러한 일반적 상식을 바탕으로 경험칙에 관한 법리를 구성할 때는 그것이 정말로
일반인의 상식에 부합하는지를 거듭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채무승인 행위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시효이익을
포기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법원의 경험칙
인식과 일반인의 상식 사이의 이러한 괴리는 사법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추정 법리를 폐기해야 할
중요한 이유이다.
2) 추정 번복에 관하여
별개의견은 추정 법리가 '사실상 추정'에 관한 것에 불과하므로 채무자는 반증을 제출하여 그 추정을
번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다21556 판결(이하 '2013년
판결'이라 한다) 등에서 채무승인이 언제나 시효이익 포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강조한다. 별개의견의 기저에는 '사실상 추정은 반증을 통해 얼마든지 번복될 수 있으므로 추정
법리는 큰 문제가 아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추정 법리가 현실에서 끼치는 영향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2013년 판결이 추정 법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판결은
장차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상호관계에 관한 법리를 정리해야 한다는 미완의 과제를 남겼다.
사실상 추정은 경험칙을 적용하여 어떤 사실로부터 다른 사실을 추인하는 작용이다. 물론 사실상
추정이 이루어진다고 증명책임 전환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상 추정은 일정한
간접사실만 증명해도 일단 요증사실의 증명이 이루어진 것으로 취급한다. 그 결과 요증사실의 증명
부담이 완화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그에 대응하여 상대방은 추정 번복의 부담을 지게 된다. 이는
요증사실 증명을 둘러싼 당사자 간의 지위나 사건의 결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대법원은 문서에 날인된 작성명의인의 인영이 그의 인장으로 현출된 것이라면 그
날인행위는 작성명의인의 의사에 기한 것으로 사실상 추정한다(대법원 1997. 6. 13. 선고
96재다462 판결 등 참조). 문서의 진정성립 분쟁에서 당사자의 지위나 사건의 결론은 이러한 추정이
인정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다.
추정되는 대상이 증명의 난이도가 높은 '내심의 의사'라면 사실상 추정의 영향은 더욱 커진다.
별개의견은 채권자가 시효완성 사실에 대한 인식이라는 채무자의 내심의 의사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추정 법리를 옹호하는 근거의 하나로 들고 있다. 하지만 그토록 어려운 증명 부담을 채무자에게
슬그머니 떠넘기는 것이야말로 더욱 큰 문제이다. 결국 이러한 부담 분배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증명책임 분배의 일반 원칙에 충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사실상 추정을 통해 그 부담을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달리 재분배하려면 그 재분배가 경험칙으로 뚜렷하게 정당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시효이익 포기 추정은 경험칙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물론 별개의견이 주장하듯 추정 법리에 따른 추정은 번복될 수도 있다. 그러나 추정 법리를
적용하면서 추정 번복을 인정한 판례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는 일본에서 추정
법리가 폐기되기 전 상황, 즉 사실상 추정이 사실상 의제처럼 굳어져 실무상 과도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던 상황과 유사하다. 대법원이 법리로 공인한 '추정'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무게와 영향력은 막강하여, 일단 채무승인이 인정되면 곧바로 시효이익 포기의 결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커진다. 법관은 대법원이 추정 법리의 형태로 제공한 간편한 판단 경로에 의존하여
사건을 안전하게 해결하려는 생각을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간편한 사건 해결은 개별
사안에서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의사표시 해석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시효이익을
박탈당하는 채무자의 희생 위에 채권자에게 부당하게 유리한 결과를 안겨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추정을 번복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애초에 추정 법리가 경험칙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한 법리인가가 논의의 진정한 핵심이 되어야 한다. 단지 '번복이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뚜렷한
근거 없이 채무자에게 추정의 굴레를 씌우고 그 번복의 부담을 부과하는 법리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정당하지 않은 법리는 바로잡는 것이 원칙이고, 정당하지 않은 법리의 토대 위에서 개별적
결론의 타당성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추정법리는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다.
아무런 채무승인도 하지 않은 채무자보다 일부 변제 등 채권자를 위한 행동을 취한 선량한 채무자에게
더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기도 하다. 물론 채무자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하고 승리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을 들어 애초에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어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잘못된 구조 자체를 공평하게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정당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이를 통해 파편적인 타당성이 아닌 보편적인 타당성을 추구할 수
있다.
3)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에 관하여
별개의견은 시효완성 여부가 문제 되는 국면에서 권리나 이익을 보유한 것은 어디까지나 채권자이고
채무자는 시효완성 항변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음에 불과하므로 시효이익 포기는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와는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적용되는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의 원칙은 시효이익 포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시효완성만으로는 채무가 당연히 소멸하지는 않는다는 이른바 상대적 소멸설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판례가 절대적 소멸설과 상대적 소멸설 중 어느 한 입장만을 명확히 취하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절대적 소멸설에 기초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법원 1966. 1. 31.
선고 65다2445 판결, 대법원 1985. 5. 14. 선고 83누655 판결, 대법원 2012. 7. 12. 선고
2010다51192 판결 등 참조).
한편 두 입장 중 어느 것을 따르더라도 시효완성 후 채무자는 일정한 '권리나 이익'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절대적 소멸설에 따르면 시효완성으로 채무는 당연히 소멸하고, 채무자는 그 채무로부터
해방되는 법적 이익을 누린다. 시효이익 포기는 실질적으로는 이미 소멸한 채무를 자발적으로 다시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가 된다. 상대적 소멸설에 따르면, 시효완성으로 채무가 당연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고 채무자에게 '시효이익을 주장할 권리', 즉 시효원용권이 발생한다. 시효이익 포기는
시효원용권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이다.
어느 입장을 따르건 시효이익 포기는 일정한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행위의 본질을 지닌다. 대법원도
시효이익 포기를 시효의 완성으로 인한 법적인 이익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의사표시로
정의하였다(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다21556 판결, 대법원 2017. 7. 11. 선고
2014다32458 판결 등 참조). 그렇다면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의 원칙이 권리나 이익 포기의 본질을
가지는 시효이익 포기에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러한 시효이익이 '항변권'의 형태로
주장된다는 점도 이러한 결론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대법원은 최근 동시이행 '항변권'의 포기를
엄격하고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25. 6. 26. 선고 2025다209893,
209894 판결 참조).
4) 채권자와 채무자 이해관계의 합리적 조정에 관하여
별개의견은 추정 법리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법리로서 정책적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시효기간이 지나도록 오래 유지된 권리의 불행사라는
사실상태의 평온이 채무자의 채무승인 행위로 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
한 채무자의 보호와 법적 안정성의 요청이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추정 법리가 채무자에게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채권법의 핵심 요청이고, 소멸시효 제도도
이 요청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수많은 채권 관련 제도나 법리 중 소멸시효제도는 비교적 채무자
보호의 취지가 강한 제도이다. 소멸시효는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을 경우 일정한 요건 아래 채무자를 그 의무로부터 해방하는 제도이다. 이를 통해 채무자는
잠재적 분쟁의 부담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소멸시효는 도산법상 면책
제도와 유사한 면도 있다. 이러한 소멸시효의 채무자 보호 기능은 시효완성 후 본격적으로 발현한다.
그러므로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익 상황은 시효완성 전과 후에 현저하게 달라진다.
시효완성 전에는 채권자는 권리를, 채무자는 채무를 엄연히 부담한다. 장차 시효가 완성하여 채무가
소멸할 수도 있다는 채무자의 기대나 희망은 본격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단계의 법적 권리나 이익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비유하자면, 시효완성 전의 시간은 '채권자의 시간'이다.
대법원이 이러한 '채권자의 시간'에 일어난 채무승인 등 시효중단 사유나 범위를 너그럽게 해석해온
것은 이해할 만한 면이 있다. 채무승인 행위로 채권자의 권리 불행사라는 사실상태의 평온이
깨어졌으므로 채무자 보호와 법적 안정성의 요청이 그리 크지 않다는 별개의견의 지적도 시효중단에
관련된 범위에서는 이해할 만한 면이 있다.
하지만 시효완성 후에는 이러한 법적 지형이 바뀐다. 채무자는 더 이상 법적 의무를 부담하지
않거나(절대적 소멸설), 시효이익을 주장할 시효원용권을 획득한다(상대적 소멸설).
시효완성으로 인하여 채무자가 획득하게 되는 법적 지위나 권리 또는 이익은 시효완성 전에는
채무자에게 주어지지 않던 강력하고도 새로운 규범적 무기이다. 이러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비유하자면, 시효완성 후의 시간은 '채무자의 시간'이다. 이러한 '채무자의 시간'에 이루어지는
시효이익의 박탈은 채무자에게 중대한 불이익을 주게 된다. 따라서 그 판단은 '채권자의 시간' 동안
시효중단 사유를 넓게 해석함으로써 채권자의 권리 박탈을 엄격하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엄격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나. 판례 변경의 필요성에 관하여
1) 일반론
별개의견은 판례 변경이 판례 유지에 비해 훨씬 우월한 가치를 가짐으로써 그로 인한 법적 안정성의
희생이 정당화될 정도의 사정이 있어야 판례를 변경할 수 있고, 단순히 새로운 법적 견해가 조금 더
낫다거나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판례를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는 판례 변경
필요성의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판례가 너무 쉽게 변경되면 안 된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 점에서 별개의견에는 경청할 부분이 있다. 다만 위 기준은 자칫 판례 변경의 문턱을
과도하게 높여 법 발전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운용될 여지도 있다. 따라서 이와 다소 다른 관점에서
판례 변경 필요성의 판단 기준에 관한 의견을 밝혀둔다.
어떤 판례가 부당하다면 그 판례는 원칙적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여기서 '부당함'이란 단순한 견해
차이가 있거나 어느 한 견해가 다른 견해보다 다소 낫다는 차원을 넘어서 기존 판례의 타당성이
명백하게 부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부당성의 논증 책임은 판례 변경을 주장하는 측에 있다.
다만 판례 변경으로 인한 사회적법적 비용이 편익보다 크다면, 부당한 판례라 할지라도 예외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에 대한 논증 책임은 판례 유지를 주장하는 측에 있다. 아래에서는 두
번째 문제, 즉 판례 변경의 비용과 편익에 관하여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본다.
판례 변경의 비용은 주로 법적 안정성과 관련된다. 판례는 법적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법관의 자의적
판단을 억제하며, 평등하고 일관성 있는 사건 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오랜 시간 축적된 사법적 지혜가
담긴 정형화된 판단 기준을 제공하여 법관의 시간과 노력을 줄여 준다. 불필요한 판례 변경을
주장하는 남소(濫訴) 가능성도 줄인다. 우리 실정법도 이러한 판례의 무게를 고려하여 판례를
규범적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소액사건심판법 제3조 제2호,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제4조
제1항 제3호, 제4호, 법원조직법 제7조 제1항 제3호 참조). 그런데도 판례를 지나치게 자주 변경하면
판례에 근거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행동을 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하여 법적 안정성을 저해할 수 있다.
즉 판례 변경의 가장 큰 비용은 이러한 의미의 신뢰 침해이다.
판례 변경의 편익은 주로 법적 타당성과 관련된다. 법을 타당하게 해석적용하여 구체적 사건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법원의 본질적 사명이다. 부당한 판례를 바로잡는 것은 이러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일환이다. 판례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거나, 법리 체계를 왜곡하거나,
정책적으로 부정적인 파급효를 가지는 경우 판례 변경은 법의 규범적 실효성을 회복하고 사법 불신을
해소하는 데 기여한다. 잘못된 판례가 앞으로 계속하여 적용될 때 우리 사회와 법체계에 가해질 수
있는 부담이나 부작용을 근본적으로 제거한다. 서로 모순ㆍ저촉되는 판례들을 정리하는 의미의 판례
변경은 더욱 명확하고 타당한 행동 및 판단 지침을 제공한다. 이처럼 적절한 판례 변경을 통해 법은
사회와 소통하며 정당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판례 변경이 가지는 고유하고도
중요한 편익이다. 이러한 편익은 판례의 부당성이 현저하거나 입법적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커진다.
2)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의 필요성
다수의견과 보충의견에서 상세하게 살펴보았듯이 추정 법리는 부당하다. 그렇다면 추정법리 판례는
변경되는 것이 원칙이다. 반면 판례 변경의 사회적ㆍ법적 비용이 판례 변경의 편익보다 크다는 점이
별개의견에 의해 성공적으로 논증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가) 판례 변경의 비용
별개의견은 추정 법리가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고, 상당한 사례 축적을 통하여 법리 적용에 관한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이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판례 변경은 법적 안정성의 희생이
정당화될 정도의 사정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별개의견이 언급하는 '법적 안정성의 희생'은 기존
판례를 변경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신뢰 침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은 신뢰 침해와 별다른 관련이 없다.
시효이익 포기는 채권자가 권리를 상당한 기간 행사하지 않아 시효가 완성된 상황에 이르러야 비로소
발생하는 문제이다. 추정 법리는 장차 이러한 문제가 실제로 발생할 때 동원될 수 있는 사후적 평가
도구일 뿐이다. 채권자가 장차 있을지도 모를 시효완성과 채무 승인, 그리고 그 상황에 적용되는 추정
법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신뢰하면서 채권을 취득하거나 채권 행사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는 거의
상정하기 어렵다. 시효이익 포기는 전적으로 채무자가 자기의 의사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므로
채권자의 통제 범위 바깥에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요컨대 추정 법리는 채권자의
의사결정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신뢰의 기반이 되지 않으므로 추정 법리를 폐기하더라도 신뢰 침해
또는 이를 통한 법적 안정성의 저해는 문제 되기 어렵다. 판례 변경의 비용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채무자의 채무승인 행위 때문에 그가 시효이익을 포기하였다고 믿는 채권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시효완성 후 이루어진 채무자의 행위로 인하여 비로소 형성된 신뢰이지 추정
법리 판례로 인한 신뢰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추정 법리의 존재와 내용을 알고 그 추정 법리에
비추어 채무승인을 시효이익 포기로 평가하는 채권자가 얼마나 있는지도 의문이다. 결국 채권자의
위와 같은 믿음은 추정 법리 판례 자체에 대한 신뢰와는 대체로 무관하고, 나중에 살펴볼 신의칙
위반의 고려 요소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나) 판례 변경의 편익
별개의견은 추정 법리를 폐기하더라도 결론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판례 변경의 실익이
크지 않다고 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주장을 하고 있다. 각각의 주장에 대한 구체적 반론은
다음 목차로 미루고 이번 판례 변경의 일반적인 방향성과 그것이 수반할 편익을 먼저 밝힌다.
우선 별개의견은 제한적으로나마 타당한 면이 있다. 추정 법리가 폐기되더라도 일반적인 의사표시
해석 원칙에 따라 결과적으로 채무자의 채무승인이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로 해석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추정법리가 폐기되더라도
채무승인은 시효이익 포기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간접사실로서 여전히 기능할 것이다. 또한
채무승인이 시효이익 포기로 해석되지 않더라도 신의칙상 시효주장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상의 범위에서는 추정 법리의 폐기가 곧바로 결론의 변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를 고려하면 이번 판례 변경은 대규모 재건축이 아니라 소규모 수선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소규모 수선이라고 실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시기와 상황에 소규모 수선을 하는 것이
대규모 재건축의 혼란과 번잡함을 막는 지름길이다. 대법원은 최근에도, 실제 문제 되는 사안의 수가
그리 많지 않지만 법리적으로 의미 있는 판례 변경을 행한 바 있다(이혼 후 혼인무효확인을 구할
이익에 관한 대법원 2024. 5. 23. 선고 2020므15896 전원합의체 판결, 협의 또는 심판 전
양육비청구권의 소멸시효에 관한 대법원 2024. 7. 18. 자 2018스724 전원합의체 결정 참조).
이러한 법 발전은 해당 법리가 직접 적용되는 사안은 물론이고, 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련 사안의
해결, 나아가 전체 법질서의 정합성 제고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 이를 무익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번 판례 변경도 의미 있는 방향성을 제공한다. 시효이익 포기 법리에 관한 채권자 편향성을
바로잡고 의사표시의 중립적 해석을 강조하는 것, 시효완성 국면에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를 본래
법이 예정한 대로 복원하는 것, 획일적 추정이 아닌 개별적 고찰을 기본적 접근 틀로 확정함으로써
의사 존중과 사적 자치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이번 판례 변경의 방향성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 자체가
판례 변경의 중요한 편익을 구성한다. 나아가 이는 실제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해석하는
장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채무승인 행위로부터 시효이익 포기 여부를 해석하는 작업은 시효기간
장단, 시효기간 도과 정도, 당사자의 관계, 당사자의 거래 경험이나 법적 지식, 채무승인의 구체적
동기와 경위 및 자발성, 채무승인 시점 및 전후의 언동, 일부 변제가 문제 되는 경우 그 변제액과
잔존액, 시효 중단 또는 정지 사유 유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세밀하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채무승인을 시효이익 포기로 곧바로 연결시키는 획일적 추정 방식은 이제 해석
도구의 목록에서 축출되어야 한다.
그 결과 종전에는 추정 법리의 틀 안에 융해되어 쉽게 시효이익 포기가 인정되던 사안중에는
'획일성이 아닌 개별성'이라는 방향성 아래에서 세밀하고 개별적인 의사표시의 탐구를 거쳐 시효이익
포기가 부정되는 사안이 생겨날 수 있다. 하나의 예만 들자면, 채무의 일부 변제를 원칙적으로 나머지
채무에 대한 묵시적 승인으로 볼 수는 있으나, 채무승인을 시효이익 포기로 추정하는 법리를 폐기하는
이상 이러한 묵시적 승인을 곧바로 나머지 채무에 대한 시효이익 포기로까지 추정할 수는
없다(독일의 일반적인 해석론도 그러하다). 이러한 예만 보더라도 판례 변경이 구체적 사안의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3) 별개의견의 구체적 주장에 대한 반론
별개의견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구체적 주장을 통해 판례 변경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주장도 판례 변경 필요성을 부정하기 충분한 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가) 2013년 판결에 관하여
별개의견은 2013년 판결 등 시효이익 포기를 부정한 여러 판결례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판결례는
추정 법리와 조화를 이룰 수 있으므로 추정 법리 폐기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이하 편의상
2013년 판결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그러나 2013년 판결은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 간의 차이,
특히 효과의사의 유무에 따른 차이를 강조하면서 '추정'이라는 도식에 기대지 않은 채 정면으로
의사표시를 해석하는 경로를 제시한 판결이다. 즉 이 판결은 추정 법리를 수용하되 그 한계를 반증
가능성으로 메우려는 접근이 아니라, 추정 법리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 기초하여 그 법리를 우회하는
새로운 접근을 취하였다. 이처럼 두 법리는 실질적으로 충돌하는 면도 있다. 참고로 추정 법리와
2013년 판결 법리를 함께 설시한 판례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2013년 판결을 통해 기존의 추정 법리가 폐기되었거나 온전히 극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3년 판결 이후에도 추정 법리에 근거한 판결은 여전히 계속 선고되고 있다(예컨대 대법원 2022.
5. 12. 선고 2021다244, 251 판결). 두 법리는 명확한 기준 없이 병존하고 있고, 법원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결론에 맞추어 법리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추정 법리가 드리우는 그림자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동일한 사실관계를 놓고 원심은 추정 법리를 적용하였으나 별개의견은
2013년 판결 법리를 강조하면서 각각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명확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
나) 이 사건의 결론에 관하여
별개의견은 구체적 사건의 권리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사법의 본질에 비추어, 판례 변경여부가 결론의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 이 사건에서 판례를 변경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한다. 우선 판례 변경이 해당
사건의 결론의 차이를 가져오지 않으면 그 사건에서 판례 변경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경우에도 새로운 법리를 선언할 필요성과 효용성이 있다면 판례를
변경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를 금지하는 법률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취지의 확립된
판례나 법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별개의견도 원용한 일본 최고재판소의 1966년 판결 역시 추정
법리를 폐기하되 신의칙 적용으로 사실상 같은 결론에 이르는 법리 구성을 취하면서, 추정 법리에
따른 원심 결론은 유지하되 종전 판례는 변경한 판결이다.
더구나 이 사건은 판례 변경 여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는 사건이다. 별개의견이 결과적으로
다수의견의 파기환송 결론 자체에 동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견은 추정
법리를 적용한 것이 아니라 2013년 판결 법리를 적용한 것에 가깝다.
이와 달리 기존에 이해되거나 운용되던 방식대로 추정 법리를 적용했더라도 다수의견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지는 의문스럽다. 실제로 이 사건에 추정 법리를 적용했던 원심은 이와 다른 결론을 내렸다.
판례 변경이 문제 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원심의 판단은 대법원에서도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추정
법리를 적용하되 그 번복은 인정하지 않은 원심판결을 파기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정 법리를 사실상 우회하여 내린 별개의견의 결론만 들어 추정 법리 폐기 여부가 이 사건
결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고 단정할 수 없다.
한편 별개의견은 제1 내지 4 차용금채무가 각각 별개로 성립되어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 뒤,
원고가 제4 차용금의 이자채무를 지정하여 변제한 것이지 그와 별도의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대해서까지 채무를 승인하거나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여지가 있다고
한다. 기존 판례에 따르더라도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는 이상 판례 변경이 불필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원고의 변제가 제4 차용금 이자채무의 변제에 충당하도록 지정하여
이루어진 것인지는 대법원이 원칙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사실인정 문제이다. 원심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러한 지정이 없었다는 전제에서 추정 법리를 적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여기서도 별개의견은 추정 법리 자체를 적용하기보다는 사실관계를 달리 파악하는 우회로를
통해 다수의견과 같은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의 역할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법원이 구체적 사건과 무관한 추상적 법리를 선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체적 사건에 적용될 법리를 탐구하고 형성해 나가는 것은 법원의 역할이다. 이러한 역할은
법률심인 대법원에 더욱 중요하다. 대법원은 과거에 발생한 구체적 사건 해결에 그치지 않고 유사
사건에 관한 법 해석ㆍ적용의 통일성과 정합성을 확보하고 관련 법리를 발전시켜 나가는 미래지향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이 사건도 그러한 기능이 발휘되어야 할 사건이다. 원심은 추정 법리를
적용하여 시효이익 포기를 긍정하였다.
추정 법리의 타당성에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원고도 상고이유서에서, 추정 법리를 적용한
원심판단을 다투면서 2013년 판결 법리에 따라 시효이익 포기가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법원은 이러한 배경 아래 추정 법리 판례 변경 여부에 관해서 심리하였고, 다수 대법관이 판례
변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변경된 판례는 향후 유사 사건의 시효이익 포기 판단에 향도적
기능을 수행하리라 예상된다. 그렇다면 판례를 변경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타당한 귀결이다.
다) 신의칙 적용에 관하여
별개의견은 추정 법리를 폐기하면서도 채무승인 후 시효 주장이 신의칙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 일본
최고재판소의 1966년 판결을 들면서, 신의칙상 어차피 추정 법리를 적용하는 것과 같은 결론에 이를
것이라면 굳이 판례를 변경할 실익이 없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신의칙을 들어 시효 주장을
일률적으로 배척하는 최고재판소의 태도는 또 다른 획일적 의제를 창설하는 것이어서 타당하지
않다거나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에 대해서는 보호할 만한 채권자의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등의
비판이 유력하게 제기되어 왔다. 2017년 일본 민법 개정 과정에서도 이러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배경 아래 채무승인만으로는 시효원용권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개정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이 문제는 해석론에 맡기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비교법적으로도 위와 같이 시효 주장을
일률적으로 신의칙으로 배척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위 판결을 우리나라 판례
변경의 거부 논거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러한 장면에서 문제 되는 신의칙은 선행행위와 모순되는 거동 금지 원칙이다. 그런데 채무승인
행위와 시효 주장이 반드시 서로 모순된다고 볼 수 없다. 시효완성 후에도 채무가 당연히 소멸하지
않은 채 일단 존재한다는 상대적 소멸설의 입장에 서면 더욱 그러하다. 채무승인은 이러한 채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표명하는 행위이고, 시효 주장은 그 인식을 바탕으로 시효완성을 이유로 그
채무를 소멸시키는 시효원용권을 행사하는 행위이다.
두 행위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 결국 채무승인 후 시효주장이 일률적으로 신의칙에 위반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사건에서도 별개의견이 원고의 시효 주장을 신의칙 위반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당사자가 신의칙 위반 주장을 하지 않는 경우 법원이 이를 반드시 직권으로
판단할 의무를 부담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신의칙 위반 여부는 채권자의 신뢰 보호 필요성과
채무자의 행위 맥락과 모습 등 양측의 모든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을 밝힌다.
8. 별개의견에 대한 대법관 노태악의 보충의견
이 사건에서 다수의견과 별개의견의 결론이 다르지 않다. 그 차이는 그동안 대법원이 취해온 선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견은 보충의견을 통하여, 별개의견의 그 어떤 주장도 판례 변경의 필요성을 부정하기에 충분한
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별개의견의 요지는 다수의견이 주장하는 논거를 살펴보더라도 그동안 오랜 기간 수많은 사안을
통하여 치밀하게 발전하면서 확립된 판례 법리 변경의 필요성을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즉
이 사건에서 판례의 변경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판례 변경의 필요성에 대한 별개의견을 보충하고, 다수의견 및 다수 보충의 견이 들고
있는 논거를 반박하며, 필요한 부분은 일부 중복되더라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가. 판례 변경의 의미와 필요성에 관하여
판례란 해당 사건의 사안에 적용될 법령에 대한 정의적 해석을 한 대법원의 판단으로 장래의 재판에
대한 지침이 되고, 법규범의 수범자인 국민들도 판례를 의사결정이나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 이러한
판례의 규범적 성격과 법적 안정성이라는 가치를 구현하려면 판례는 변경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특정 쟁점과 관련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일정한 방향으로 판례가 확립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확립된 판례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종래의 견해가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의관념에 크게
어긋나게 되었거나 해당 법령의 취지를 현저히 벗어나게 되는 등 이를 바꾸는 것이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가치를 가지며 그로 인하여 법적 안정성이 희생되는 것이 정당화될 정도의
명백한 사정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새로운 법적 견해가 다소 낫다거나 좀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확립된 판례를 바꾸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여 타당하지 않다.
특히 판례 변경의 필요성은 판례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던 경우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된 경우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과거의 해석이 잘못된 것은 아니고
단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게 된 것일 뿐이므로 법적 안정성과 신뢰보호의 이익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에는 판례 변경에 더욱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나.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
1) 우선 드는 의문은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나 하는 문제이다. 다수의견은
추정 법리가 경험칙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일반인의 상식에 비추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는, 전통적으로 합리성과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서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밀접한 인간적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왔다. 적어도 윤리적인 측면에서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한 채무자는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사실상 추정하는 추정 법리가 처음부터 경험칙 또는 상식에
반하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과거 마을 공동체 내의 가까운 사이에서만 금전거래가
주로 이루어졌던 사회를 생각해보면 그다지 의문이 들지 않는다. 다수 보충의견이 소멸시효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한 도산법상 면책제도도 입법정책상 필요하여 특별히 법률로 정하여 도입된 것이지 우리
사회의 경험칙이나 상식을 반영한 제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추정 법리가 처음부터 경험칙과 상식에
반하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오랜 기간 추정 법리의 타당성을 인정해온 판례들과 이를
근거로 전개된 하급심 실무를 일거에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2) 이처럼 판례 법리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 아니었고 오랜 기간 일관된 방향으로 확립된 경우
시대와 상황의 변화를 들어 판례를 변경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여야 한다. 특히 대법원이 법리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형식적 법리 적용으로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제한해왔다면 판례 변경의 필요성은 더욱 떨어진다.
대표적으로 '위약벌의 약정에 대하여 손해배상액의 예정에 관한 민법 제398조 제2항을 유추적용하여
감액할 수 없다.'는 판례의 변경이 문제 된 대법원 2022. 7. 21. 선고 2018다248855, 248862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다수의견은 판례가 타당하고 그 법리에 따라 거래계의 현실이 정착되었으므로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은 “대법원은 오랫동안 위약벌 법리를
큰 틀에서 유지하면서 '공서양속 일부 무효' 법리를 추가하여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합리적인
해석을 통해 공평을 기하여 왔다. 나아가 '손해배상액의 예정과 위약벌의 성격을 함께 가지는
위약금'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당사자의 의사나 거래의 실체를 반영하는 등 꾸준히 위약벌 법리의
단점을 보완하였다.”라고 지적하였다.
취업규칙의 효력에 관한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이 문제 된 대법원 2023. 5. 11.
선고 2017다35588, 35595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판례 변경에 반대한 대법관 6인이
별개의견으로 “대법원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를 엄격하게 해석ㆍ적용하여 왔으며 상당한 기간의
사례 축적을 통하여 현재 재판실무상 위 법리의 폐기 여부가 문제 되는 사안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법리 적용에 관한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이 충분히 확보되었다.”라고 강조하였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추정 법리의 경우에도, 대법원은 판례를 유지하면서도 대법원 2008. 7. 24. 선고 2008다25299
판결, 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다21556 판결 등에서 의사해석 결과 채무승인 또는 시효이익
포기의 효과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반증이 제출될 경우 추정의 번복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단점을 보완하고 구체적 타당성을 도모해왔다.
이에 대하여 다수 보충의견은, 추정 법리가 현실에서 끼치는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고 추정 번복을
인정한 판례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추정 법리는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으므로
변경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추정 법리와 의사해석을 통한 반증의 법리가 조화롭게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현실적 문제이지 추정 법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추정 법리는 '사실상
추정'이므로 얼마든지 추정이 번복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의사해석 결과에 따라 추정이 번복되어
시효이익 포기로 인정되지 않은 판례들이 축적된다면 다수 보충의견이 우려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판례 변경 없이도 해결될 수 있다.
추정 법리 자체가 애초에 잘못된 것은 아니고 의사해석을 통한 반증에 관한 법리를 발전시킴으로써
단점을 보완해 왔으며, 실제로 의사해석 결과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을 하였더라도 시효이익 포기로
인정되지 않은 사례들이 축적되고 있으므로, 오랜 기간 확립된 추정 법리를 변경해야만 할 중대한
필요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3) 다수 보충의견은 추정 법리가 채권자의 의사결정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신뢰의 기반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추정 법리를 폐기하더라도 신뢰 침해 또는 법적 안정성저해는 문제 되기
어려우므로 판례 변경 비용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판례 변경의 문제를 비용
문제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다. 추정 법리 판례의 변경으로 인한 침해가 문제 되는 신뢰는, 채권자의
특정한 행위 시점의 신뢰가 아니라 소멸시효 및 시효이익 포기를 둘러싼 법제도 전반에 관한
신뢰이다. 즉 분쟁이 발생한 경우 동일한 유형의 사안에서 판례가 시효이익 포기로 인정하였음을
신뢰하였는데, 판례가 변경되어 시효이익 포기가 인정되지 않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법제도 전반에
관한 신뢰 침해가 문제인 것이다.
일반인이 특정한 판례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신뢰하면서 행동하는 경우는 오히려 이례적일 것인데,
다수 보충의견과 같이 개별적인 신뢰가 침해되어야만 판례 변경의 비용이 발생한다고 본다면 판례
변경으로 인한 신뢰 침해가 문제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추정 법리가 특정 채권자의
신뢰와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하면 채권자는 보통 해당 채무를
변제받을 것으로 신뢰할 것인데, 이러한 신뢰의 근저에는 채무자가 채무를 승인한 이상 번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신뢰, 즉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하는 법리에 관한 신뢰가 깔려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의 비용이 크지 않다는 주장도 찬성하기 어렵다.
4) 다수 보충의견은,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이 시효이익 포기 법리에 관한 채권자 편향성을
바로잡고 획일적 추정이 아닌 개별적 고찰을 기본적 접근 틀로 확정하는 등 의미 있는 방향성을
제공하므로 판례 변경의 편익이 있다고 한다. 다수의견과 같이 판례를 변경하더라도 무익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별개의견은 판례의 변경이 무익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오랫동안 확립된 판례 법리의 변경은
신중하자는 것이다. 또한 추정 법리가 채권자에 편향되어 있다거나 획일적이라는 비판은, 앞서 본
것처럼 추정 법리와 의사해석을 통한 반증의 법리가 조화롭게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이지 추정 법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다수 보충의견이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를 변경하고 시효이익 포기 여부를 개별적으로
고찰해야 한다면서 내세운 판단 요소들은, 대법원이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 함께 발전시켜온
의사해석 법리의 판단 요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추정 법리 판례를 변경하지 않더라도
시효이익 포기 여부는 결국 구체적인 의사해석을 통하여 결정되는 것이므로 추정 법리 판례를
변경하는 것이 개별 사안의 결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고, 따라서 판례 변경의 실익도
크지 않다.
다. 대법원 구성원의 변동과 판례의 변경에 관하여
1) 판례 자체는 법규범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법을 구체화한 판례는 엄연히 법질서의
일부를 구성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추상적인 법 못지않게 강력하고 현실적인 규범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규범력은 시간의 흐름과 사회 변화에도 판례가 쉽게 변경되지 않고 무겁게
존중되어야만 비로소 확보되어 법적 안정성에 기여할 수 있다.
우리 대법원은 법해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해왔다. 즉, 법은 원칙적으로 불특정
다수인에 대하여 동일한 구속력을 갖는 사회의 보편타당한 규범이므로 법의 표준적 의미를 밝혀
객관적 타당성이 있도록 해석하여야 하고, 가급적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법적 안정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실정법은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사안을 염두에 두고
규정되기 마련이므로 사회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안에서 구체적 사안에 맞는 가장 타당한
해결이 될 수 있도록 해석ㆍ적용할 것도 요구된다. 요컨대 법해석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법적 안정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는 데 두어야 한다. 나아가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법률에 사용된 문언의 통상적인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법률의 입법 취지와
목적, 제ㆍ개정 연혁, 법질서 전체와의 조화, 다른 법령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는 체계적ㆍ논리적 해석
방법을 추가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위와 같은 법해석의 요청에 부응하는 타당한 해석을 하여야
한다(대법원 2013. 1. 17. 선고 2011다83431 전원합의체 판결 및 대법원 2018. 6. 21. 선고
2011다112391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그런데 대법원 구성원의 변동에 따라 판례가 쉽게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면 판례의 규범적 효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결국 법질서 전반의 안정성을 위협할 우려가 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안인데도
특정 시점의 재판부 구성에 따라 판례가 변경되어 당사자가 받는 판단이 달라지는 것은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
어떠한 판례가 오랜 기간 확립되었다면 대법원 구성원의 변동에 따른 판례의 변경은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판례가 오랜 기간을 거쳐 확립되었다는 것은, 곧 그동안 관여해온 수많은 법관들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심판한 결과 해당 판례가 타당하다는 견해를 취해왔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떠한 시점에 대법원을 구성한 대법관들이 오랜 기간 확립된 판례를 변경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견해가 압도적으로 우월함을 논증할 필요가 있고, 양론이 가능하지만 새로운 견해가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는 정도로 판례 변경을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는 대법원 1967. 2. 7. 선고 66다2173 판결 이래로 50년이 넘도록
일관되게 확립되었고 그동안 수많은 대법관들이 관여했지만 전원합의체를 통한 판례 변경이 시도된
적은 없었다. 물론 추정 법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할 경우의 문제점이 지적된 사례들도 있었지만
대법원은 의사해석 법리를 통하여 추정 법리의 단점을 보완해왔고(대법원 2008. 7. 24. 선고
2008다25299 판결, 대법원 2013. 2. 28. 선고 2011다21556 판결 등 참조), 이를 통하여 판례의
일관성과 법적 안정성이 확보되었다. 대법원은 최근까지도 판례 변경의 필요성에 대한 큰 의문 없이
위와 같은 법리를 다시 확인하면서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한 바 있다(대법원 2022. 5. 12. 선고
2021다244, 251 판결).
다수의견이 추정 법리를 변경해야 한다면서 드는 논거를 살펴보아도 종전 추정 법리의 논거에 비하여
훨씬 우월하다고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대법원이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의사해석을 통해
단점을 보완하여 구체적 타당성을 도모한 사례들이 축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판례 변경이 결론에
특별한 차이를 가져온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판례 변경이 필요하다고 하는 다수의견의 태도는,
그동안 추정 법리의 타당성을 인정해온 수 많은 대법관들의 견해를 경청하지 않은 채 판례 변경의
필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압도적으로 우월한 논거와
가치로 뒷받침되지 않고 결론에도 특별한 영향을 주지 않는 판례 변경은, 어디까지나 법적 안정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는 데 있는 법해석의 목표에 반하고, 주어진
법률하에서 사회의 계속성 유지를 지향하는 법원의 법해석 기능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라. 이상과 같이 별개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을 밝힌다.
대법관 노태악 이흥구 오경미 오석준 서경환 권영준(주심) 엄상필 신숙희 노경필 박영재 이숙연
마용주